여산에서의 순교

  • 1868년(무진년) 여산에서 천주교 교우들의 사형이 집행된 것은 사법권을 가진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산(礪山)은 왕후(王后)의 외향(外鄕)이며 성향(姓鄕)이었다. 이 고을 출신 송선(宋璿)의 딸은 여흥부원군(礪興府院君) 민제(閔薺)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태종(太宗)의 비(妃)인 원경 왕후(元敬王后)가 되었다. 그래서 왕후의 외가 고향이라 하여 세종 18년(1436년) 현(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부(府)로 승격시켰다. 또한 여산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며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성향(姓鄕)인 것이다. 이러한 왕후들과 관련되어 부(府)로 승격되었다. 또한 여산에는 전라도 다섯 진영장(鎭營將) 중 후영장(後營將)이 있었다.
  • 1868년 여산에서는 교수형, 참수형, 백지사형으로 많은 수의 교우들이 치명했다. 교우들은 옥과 숲정이와 장터에서 처형되었는데 기록상으로 알 수 있는 숫자는 25명이다. 이들의 거주지를 보면, 고산 넓은바위의 김성첨(토마스. 62세), 김명언(안드레아. 62세), 김정규(야고버. 47세), 김정언(베드로. 23세), 김흥칠(마티아 혹 필립보. 19세), 김 마리아(혹 베드로. 19세) 등 한 가족 6명을 포함하여 오윤집 (타데오. 39세), 박 베드로(40세), 이 필립보(19세), 김성화(야고버. 52세), 이서방(영명과 나이 미상), 박 도미니코(이름과 나이 미상), 김찬여(요한), 박성실(요한), 이 요한(이름과 나이 미상), 오 유리안나 등 16명. 고산 다리실의 장윤경 (야고버. 37세)1명. 고산 산수골(시목동)의 전 마리아(혹 데레사. 35세), 박성진의 아내(이름과 나이 미상) 등 2명. 용담 머리골의 송 가롤로(50세), 박운겸(나이 미상) 등 2명. 금산 흥동리의 김윤문(나이 미상) 1명. 금산 개직리의 한경영(혹 정률 요한. 27세), 손 막달레나(27세) 등 2명. 진산의 전 루시아(35세) 1명.
  •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문서에서 확인된 숫자만 25명이나 되었으나 틀림없이 이 숫자보다는 더 될 것이다. 순교자들에 대하여 이런 입전이 전해지고 있다. 비록 낙수(落穗)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흘려버릴 수 없는 일화이다. 어느 날인가 8명이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는데, 그중 1명이 배교하는 일이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 밤이었다. 옥사장이 단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배교하지 않은 일곱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워 주고 한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웠다 벗겼다 했다. 그래서 옥사장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교자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옥사장은 배교자 대신 치명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서 일곱 사람과 함께 치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전의 사실 여부가 어찌 되었건 이 입전을 소중히 간직하여 전해 주려는 교우들의 숨은 뜻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옥사장이 결단을 내리게 된 동기는 교우들이 옥중에서 보여준 금석 같은 신앙과 표양을 보고 양심의 눈을 부비고 뜬 것이리라. 그리고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초연한 행동에는 무엇인지 모를 깊은 뜻과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옥사장은 천주교 신앙으로 전향하고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입전자들의 내심에는 순교만큼 인간을 감동시키는 일도 없으며, 순교는 큰 전교였다는 것을 꼭 전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순교는 천상에서 가장 큰 영광이지만 만일 하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이룩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허락하신다면 신앙의 연륜이 길건 짧건 관계없이 순교가 가능하며, 순교는 인간의 결단과 하늘의 승낙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일러주려는 마음이었으리라.
  • 순교자들이 옥중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교우들의 굶주림이 얼마나 참혹했기에 오죽해야 옥사장까지 동정심이 발동했을까. 옥사장은 교우들에게 바가지를 주면서 옥 밖으로 나가 동냥을 해 먹고 오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빌어먹을 만한 곳도 변변치 못한 고을이었던가 보다. 그래서 빈 바가지를 들고 들어오는 죄수 신도들을 보고 하는 말이 바가지를 주며 내 보낼 때는 도망가라는 말인데 바보같이 왜 들어오느냐고 호통을 쳤다. 교우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다시 들어 왔다." 교우들의 처형일은 어김없이 장날이었다. 옛 옥터가 있던 지금의 배다리 옆에는 미나리꽝이 있었고 그 부근에서는 장이 섰다.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선전의 장소로 장꾼들이 볼 수 있는 곳보다 더 좋은 장소도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 처형당할 교우들을 풀어놓자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그들은 눈에 보이는 풀들을 정신없이 뜯어먹었다. 형관들은 순교자들을 처형한 후 미나리꽝에다가 집어던졌다. 그래서 교우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야음을 틈타 목숨을 걸고 건져내었다. 그런데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 보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 배가 고파서 솜을 다 뽑아 먹었던 것이다.
  •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둔 교우들은 이분들을 묻을 장소로 천호산을 택했다. 천호산에는 이미 1년 전에 전주에서 치명하신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산의 순교자들도 당연히 그분들의 옆에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교자들은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묻었지만 어떤 순교자들은 다급한 나머지 적당한 곳에 가매장했다가 훗날 전주의 순교자들 곁에 묻었다. 이러한 사실은 1983년 5월에 묘지를 발굴했을 때 일명 방아골에서 한 분, 현재 성지에 서 있는 십자가 아래 부분에서 한 분, 그리고 김성화 (야고버) 외 여섯 분으로 알려진 무덤들에서 드러났다. 특히 김성화 등 7인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던 무덤을 발굴했을 때 이러한 현상이 드러났다. 첫째, 이 무덤에는 7인의 아니라 8인이 묻혀 있었고, 둘째, 유해의 안치된 모습은 각자의 두개골 밑에 신체의 뼈들을 추려서 마치 장작 다발을 놓듯이 다북다북 놓은 상태였다. 이것은 다른 곳에 묻혀 있다가 육탈된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얼굴 쪽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놓여진 것이 아니라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들의 무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으로, 역적은 백성의 하늘인 왕의 명령을 거스리고 죽었다 하여 죽어서도 하늘을 볼 수 없으므로 얼굴을 땅에 엎어놓는 관습을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으로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교우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천호성지에 묻혀 있는 무명 순교자들은 넓은 바위 출신의 김성첨 가족 6명과 같은 마을의 교우들로 보아도 과히 틀림이 없을 것이다.